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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똥꾸를 찌른 솔숲 23. 바똥솔은 작은 사막의 우물이다.

함께 만든 사막의 작은 우물 '바람의 똥꾸를 찌른 솔숲'

 

 

을은 장작이 확 타올랐다가 열가가 뚝 떨어진 잿빛 도는 빨간 아궁이다. 그 열기에 감이 붉게 익고, 붉나무는 더 붉게 타올랐다.

 

잿빛 도는 빨간 아궁이 

 

가을 햇살 한 주먹을 꽉 쥔 바람의 똥꾸를 찌른 솔숲도 아이들 목소리는 어쩌지 못하는 모양이다. 아이들 목소리가 뾰족한 잎끝보다 더 뾰족하게 튀어나왔다. 올해 마지막 전문가 숲 놀이 수업에서 생물의 변태를 이해하는 딱지치기 놀이, 해먹 놀이, 밧줄 그네 놀이를 했다.

 

[호기심의 똥꾸 찌르기]

 

활동1. 경쟁 놀이 '생태계 변태 놀이'

 

 

활동2. 협력 놀이 '해먹과 놀기'

 

 

활동3. 모험형 놀이 '나무그네 타기' 

 

 

활동4. 표현 감수성 놀이 '솔방울로 이름 만들기'

 

수업이 끝나고 조금 여유가 있는 시간에 솔방울로 자기 이름을 쓰고 가을 빛깔을 찾는 관찰 활동을 했다.

 


 

 밧줄 놀이는 아이들에게 모두 좋아한다. 가장 큰 웃음과 환호성이 난다. 모든 프로그램에서 모든 아이가 다 신명 나는 것은 아니다. 몇몇 아이들에게 바람의 똥꾸를 찌른 솔숲도 사막이다. 그 아이에게는 교실도 집도 사막이다.
 “ 사막이 왜 아름다운지 알아?”
 “ 어딘가에 우물이 숨어 있기 때문이야.”
 어린 왕자 책에 나오는 대화다.

 사막 속에 갇혀 있는 아이에게 바람의 똥꾸를 찌른 솔숲이 어린 왕자 바라보는 ‘우물이 숨어 있는 사막’이면 좋겠다.

 

 

람의 꾸를 찌른 숲은 사막에 숨어 있는 우물이다.

 

 ‘모든 아이가 행복하게 놀 수 있다’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아니, 욕심이다. 놀이는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이다. 학습은 이성의 논리적 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면 놀이는 감정이 비논리적으로 관계를 맺는 과정이다. 감정 표현과 교환이 익숙하지 못하고 서툰 아이에게 놀이는 공부처럼 힘들다. 밖에서 이것을 지켜보아야 하는 선생들은 더 큰 내상과 상처를 입는다.

 

 

 

  바람의 똥구를 찌른 솔숲에서 아이들이 모두 행복하고 즐겼을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바람의 똥꾸를 찌른 솔숲 활동은 피터 팬의 레버랜드가 아니다. 아이들을 만나는 선생님은 요술을 부르는 팅커벨도 아니다. 숲과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감정을 배출할 기회를 주는 산파다.

 

바통솔은 피터팬의 영토가 아니다.

선생님과 숲놀이 선생님은 요술을 부리는 팅커벨도 아니다.

 바람의 똥꾸를 찌른 솔숲은 감정을 표현하는 공간일 뿐이다.

 

 

 몇몇 아이들 맘에 차가운 쇠들이 돋아있다. 끝은 바늘처럼 날카롭고 예리하다. 부딪칠 때마다 쇳소리가 난다. 옆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자신도 상처를 받는다. 교실에서도 독한 맘들이 쇠가 되어 삐져나오는데 밖에서 이 맘들이 가만있을 리 없다. 더 큰 소리도 부딪치고 더 크게 돋아난다. 학교 선생님들이 이 모든 소리와 쇠고챙이 맘을 보면서 숲에 올랐다.

 

 어린 왕사의 사막 어느 구석에 우물이 숨어 있듯 바람의 똥꾸를 찌른 솔숲에서 배출되는 감정 한쪽에 따뜻한 온기가 배여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숲이 작은 우물이 된 이유다.

 


무의미한 반복을 강요하는 나선형 교육과정을 팍 줄이면 안 될까?

 

 반복은 무엇을 확실히 아는 방법이다. 많은 것들을 그렇게 배워 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난 이 ‘반복’에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 초등학교는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중학교도 1학년부터 3학년까지, 고등학교도 1학년부터 3학년까지 길게 줄을 지어 놓았다. 그리고 각 학년에 맞게 배워야 할 내용을 배분했다. 이게 교육과정이다. 마치 그 학년의 것 이외를 넘어 가르치면 금기의 선을 넘은 것처럼 오해받기도 하는 구조다.

 

지루하게 반복적으로 무의미한 것을 반복구조를 개선해야 한다.

 

 

 너무 길게 널어나 있기에 우린 너무 무의미한 반복을 아이들에게 강요한다. 아이들은 발달 단계에 맞게 발달하지만, 지식의 습득에 있어서 그렇게 많은 차이가 나지 않는다.  소수의 개념을 꼭 4학년 때 배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문학의 인물 사건 배경의 기본 개념을 지속해서 배야 할 정도로 중요한 개념도 아니다. 비슷한 것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과정은 더 자세히 아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이해하는데 데 큰 지루함을 준다.

 

 아이들은 한꺼번에 배우고 느낄 수 있다. 왜 이것을 거부하는지 알 수 없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수업 구조를 확 줄이고 교육과정에 더 큰 여유를 만들어야 한다. ‘교육과정 진도’라는 강박에서 자유롭게 만들어야 학교 현장의 체험 학습이 더 넓고 깊어진다.

 

체험학습은 부침개다.

조각 조각 맛이 다르다.

 

 

 체험학습은 한꺼번에 배우는 구조다. 마치 다양한 재료들이 섞여 있는 부침개 맛이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서 누군가는 먼저  한 조각 부침개에서 부추 맛을 맛보고 누군가는 부침개 속에서 조갯살을 맛본다. 다 부침개가 품고 있는 같은 맛이다.

 


함께 만든 사막의 작은 우물물 바람의 똥꾸를 찌른 솔숲

 

사막에서 살기 남기 위해 우물을 파고 우물물을 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막은 모든 사람 눈에 보이지 않고 그 우물물도 모든 사람에게 우물로 보이지 않는다. 반대로 몇 사람에게는 분명한 사막이고 그에게는 분명한 우물물이다.

 

 바람의 똥꾸를 찌른 솔숲은 체험 학습이 이벤트가 되고 김밥 먹으러 비싼 경비를 내고 현장학습을 가는 현실을 안타까워 하는 사람에게는 작은 우물이다. 체험학습이 학교 공간들이 어떻게 구조화되어야 되는지 답을 찾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분명 우물이다.

 

 

모든 사람에게 우물로 보이지 않아도 좋다. 아이들에게 즐거움을 선물하기 위해서 예산을 확보한 학교와 선생님들, 체험학습의 질을 확보하기 위해서 멀리서 지원과 봉사를 해 주신 경남숲교육협회, 밧줄 놀이 협회, 거제환경교육네트워크 선생님이 같이 우물을 팠다.

 

경남숲교육협회 숲 놀이 선생님

부산경남밧줄놀이 협회 밧줄 놀이 선생님

거제환경교육네트워 숲 놀이 선생님

 

고맙고 감사합니다. ^^

 

 우리가 판 우물물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다. 몇 분은 직접 바람의 똥꾸를 찌른 솔숲으로 오셨다. 아이들이 놀고 있는 숲은 많은 시민들이 숲놀이를 배우고 공부하는 교실로 발전했다. 우리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눈에 사막에 숨어 있는 우물로 보였다면 우리가 판 우물이 쓸데 없는 우물은 아니다.

 


 

누군가의 눈에 세상은 사막이고 파야할 우물은 아직 많다.

 

오늘 마지막 두레박으로 올해의 마지막 우물물을 퍼 올렸다. 밑그림에 마지막 붓질을 하고 나도 떠나야 한다. 그 우물이 어떻게 될지 누군가 물었다.
“세상에 파야 할 우물은  많아요?”
걱정해야 할 부분 내가 만나는 사막에서 다시 우물을 팔 수 있는 용기다.  

 

 을은 다홍빛이다. 고운 재로 열기를 숨긴 장작불을 후하고 불 때 확 번졌다가 잦아드는 다홍색 노을이 보고 싶다. 내일 세상 바람이 후하고 입바람을 길게 불어 다홍빛 노을이 빨갛게 걸리면 좋겠다.

 

쿵쿵쿵 2018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