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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하기에 소중한 생물들의 친구/양서류와 인연만들기

애매한 두꺼비 돌에 치였다

애매한 두꺼비 돌에 치였다
  
 

 봄비가 왔다. 땅이 봄비를 머금고 솜처럼 부드러워졌다. 땅은 돋아나기 시작한 봄눈들 애간장과 등살에 얼마나 간질간질 가려울까? 땅들의 변화를 보면서 생명은 물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을 실감한다. 봄비를 머금고 쇠별꽃이 머리를 곱게 빗고 있고, 노루귀는 화장한 신부 얼굴로 봄비에 답했다. 개불알풀은 짙은 청색으로 봄나물을 캐는 사람들을 반기며 인사하기 바쁘다. 성질 급한 광대나물은 한 뼘이나 자라서 머리를 내밀고 등애와 벌 나비를 마중할 차비를 끝냈다.

 

 

봄을 기다린 것은 푸르게 변하는 식물들만이 아니다. 그 봄비를 맞으면 산에서 두꺼비가 알을 낳기 위해서 산에서 내려 왔다. 따뜻한 봄비에 한기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겨울잠에서 깨어났다. 잠을 깨자마다 고픈 배를 참고 뚜벅뚜벅 산을 내려 왔을 두꺼비를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 산을 내려오는 두꺼비

 

 


두꺼비를 사람들이 가끔 ‘뚜꺼비’로 잘못 표기한다. 나도 이렇게 실수를 한다. 두꺼비는 더터비·두텁·둗거비로 옛날에 표기 하였다. 한자로는 섬여(蟾蜍)·섬제(詹諸)·나하마(癩蝦蟆) 등으로 불린다. 뚜꺼비 모습은 참 재미있다. 피부는 울퉁불퉁 돋아난 여드름처럼 거칠고, 뚱뚱한 몸에 비하여 약해보이는 다리, 뚜벅뚜벅 걸어가는 모습은 우스꽝스럽다.

 

 옛날 사람들 눈에도 재미있어 보이는 모양이다. 우리나라 설화에 보면 ‘여우·너구리·두꺼비의 떡 다툼’이라는 설화가 있다. 떡 한 시루를 쪄놓고, 내기를 해서 이기는 쪽이 혼자 먹기로 했는데 두꺼비가 최종 승자가 되는 이야기다. 너구리가 자기의 키가 하늘에 닿았다고 하면, 여우는 하늘 밖에까지 올라갔다고 하고, 두꺼비는 여우에게 그때 너의 머리에 뭉실한 것이 있지 않더냐고 묻고 여우가 과연 그런 것이 있었다고 하면, 그것이 내 불알이라고 한다. 이 설화에서 두꺼비가 이길 수밖에 없는 구조다. 왜냐하면 늘 마지막 말을 받아서 적당하게 표현하면 되기 때문이다. 두꺼비가 느리지만 현명하고 지혜롭다는 생각이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두꺼비가 이겨서 떡을 혼자 먹었기 때문에 배가 불룩해졌으며, 떡고물만 받은 여우와 너구리가 화가 나서 이를 두꺼비의 등에 뿌리고 밟았기 때문에 두꺼비의 껍질이 우툴두툴하다는 것이다. 못생기고 흉물스럽게 생각 할 수 있었는데 이렇게 멋지게 표현한 조상님들의 슬기와 재치가 너무 멋스럽다.

 

 

우리나라 속담에 ‘애매한 두꺼비 돌에 치였다’라는 속담이 있다. 이 속담은 아무런 죄도 없는 두꺼비가 돌 밑에 들어가 있다가 치여 죽게 되었다는 뜻으로 애매하게 화를 당하거나 벌을 받게 되어 억울함을 비유적으로 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제 이 속담은 현실이 되었다.

 

 

 


봄비에 깨어난 두꺼비들이 산과 인접한 소류지로 이동을 하다 로드킬 당하는 모습들이 자주 목격된다. 두꺼비는 수 천년 동안 그 길을 뚜벅뚜벅 걸어 내려 왔다. 두꺼비가 현명할지라도 인간의 욕심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변을 당하고 마는 것이다. 해결 방법은 단순하고 명쾌하다. 인간의 현명함과 관심으로 두꺼비 봄맞이를 지켜 주어야 하는 차례가 온 것이다. ‘여우·너구리·두꺼비의 떡다툼’의 설화의 마지막 자리에 인간이 앉아서 얼마나 사람들이 현명한 존재인가를 증명해 보일 차례다.

 

2014.03.07. 오늘신물 칼럼으로 제공한 글